본문 바로가기

movie

[8월의 크리스마스 리뷰] 잔잔한 사랑, 잔잔한 죽음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감독: 허진호

출연: 한석규 (정원) , 심은하 (다림)

옛날 한국 영화에 푹 빠져있는 요즘이다. 최근 들어 그중에서도 좀 무거운 영화들을 많이 봐서 그런지, 약간 쉬어가는 느낌으로 편안한 영화를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고심 끝에 고른 영화가 바로 1998년 작품인 '8월의 크리스마스'였다.

허진호 감독의 작품인데, 사실 영화를 제대로 본지 얼마 안 된지라 어떤 분이신지 잘 몰랐는데, 좀 찾아보니 '봄날은 간다'와 최근 개봉했던 '천문:하늘에 묻는다' 작품도 만드셨다고 한다. 주연배우는 한석규와 심은하이고, 그때 당시 가장 유명했던 남, 여 배우라고 한다. 사실 심은하 배우가 연기한 작품들이 상당히 많은데 배우로써 활동을 그만한지 꽤나 오랜 시간이 되었기에, 필자에게는 꽤 생소한 이름이었다. 물론 한석규 배우는 최근 '낭만닥터 김사부' 나 '뿌리깊은 나무' 같은 드라마에서 많은 인기를 누린지라 필자 또래의 사람들도 많이 알고 있다. 역시 배우와 감독은 대부분 같이 가는 경우가 많다고 느끼는데, 아니나 다를까 '천문: 하늘에 묻는다'에서도 허진호 감독 - 한석규 배우의 조화가 이어진다.

<오토바이로 다림을 데려다주는 정원>

출처: 8월의 크리스마스

 

영화 내내 비치는 정원과 다림의 사랑은 잔잔하다. 과하게 기쁘지도 않고 과하게 슬프지도 않다. 잔잔한 느낌 그대로 영화 후반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그 평화롭고 잔잔한 느낌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이 오토바이를 타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이 영화에서 비치는 거리는 소음도 없고, 차도 별로 없어 거리가 복잡하지도 않고, 오토바이를 타기에 최적의 장소가 아닐까 싶다. 유유하게 그냥 오토바이로 이동하는 모습이 평화로운 영화의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것 같다. 너무 복잡하고 바삐 움직이는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영화에서 나마 이렇게 여유로운 기분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다. 물론 오토바이나 스쿠터를 많이 타보지는 못했지만, 좀 한적한 곳에 여행을 가면 요즘 오토바이를 대부분 빌려서 타는 필자에게 그때의 행복한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게 만드는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가족사진 후 본인의 단독 사진을 찍으러 온 할머니>

출처: 8월의 크리스마스

 

할머니가 홀로 사진을 찍으러 올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병에 걸려 본인이 죽을 것이라고 예상한 정원이 죽기 전에 자신의 영정사진을 찍을 때는 또 어떤 기분이었을까? 사진이라는 것은 어떤 순간을 추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장소를 갔을 때 배경을 찍거나, 친구들이나 가족이랑 단체 찍을 때도 그때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 사진을 남기게 된다. 예전보다 확실히 사진의 수요가 많은 요즘이지만, 사진관에서 찍는 사진은 좀 더 의미가 강한듯하다. 보통 사진관에서 찍는 사진은 본인의 가장 아름답거나 멋진 모습을 담기 위함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취업 사진을 찍거나 집에 걸어놓을 가족사진을 찍을 때는 한껏 멋을 부리고 사진관에서 찍게 된다. 하지만, 영화에서 나오는 두 인물의 사진에서는 왠지 모를 슬픔이 느껴진다. 본인이 이 세상에 없을 때 쓰여야 할 사진. 사실 안 찍을 수도 없는 이런 종류의 사진을 찍으러 가는 사람들의 마음은 얼마나 복잡 미묘할까. 그래도 해맑은 웃음으로 사진을 찍는다. 본인을 기억해야 할 남겨진 사람들에게 비치는 본인의 마지막 모습이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리모컨 사용법을 알려주다 화난 정원>

출처: 8월의 크리스마스

 

정원의 아버지가 티비를 조작함에 있어 아주 힘들어하는 모습이다. 정원이 계속해서 알려주지만 아버지는 잘 해내지 못하고 화가 난 정원은 문을 박차고 나가버린다. 본인이 죽었을 때, 홀로 남겨진 아버지에게 티비 조작을 가르쳐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스케치북에 보드마카로 사용법을 큼지막하게 쓴다. 여기서 정원의 마음은 화남이 아니라 답답함과 속상함이 아니었을까. 이 장면을 보면서 참 부모님이 무언가를 몰라서 필자에게 여쭤보실 때 귀찮다고 투정 댔던 과거의 모습들이 자꾸 떠오른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경험을 해보지 않았을까. 물론 영화에서의 주인공의 상황과 나의 상황은 확연히 다르지만, 부모님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듯하다.

<창문 너머로 다림을 보는 정원>

출처: 8월의 크리스마스

정원은 본인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창문 너머로 밖에 다림을 볼 수 없었고,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다. 결국 마지막에 그녀와 함께 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영화를 보면서 처음에는 이 장면이 이해가 안 되었던 게, 죽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과 추억을 하나라도 더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만나야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정원이 그때 다림을 만나러 나갔다면 다림에게 남겨진 시간들이 너무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결국 앞에서도 그랬듯이 정원은 본인이 죽고 난 뒤 남겨진 사람들을 생각하는 태도를 계속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출처: 8월의 크리스마스

'내 기억 속에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출처: 8월의 크리스마스

곱씹어 봐도 너무 마음을 따스하게 해주는 마지막 대사이다. 다림은 정원이 없는 초원사진관에 편지를 넣으려다 말다를 반복하다 실수로 편지를 넣게 된다. 그리고 병원에서 다시 돌아온 정원은 다림을 마지막에 편지를 답장을 쓰지만 보내지 못하고, 다림의 사진이 있는 박스에 답장을 적은 편지를 넣고 닫게 된다. 처음에는 이 답장이 다림에게 전해졌는지 안전해졌는지 잘 몰랐지만, 마지막 초원사진관 문에 걸려있는 다림의 사진을 보고 확신했다. 상자 속에 있던 다림의 사진이 문에 걸려 있다는 것은 정원이 죽고 난 뒤, 그 후임자가 상자를 열었다는 것이고 거기 안에 다림의 편지에 대한 답장도 성공적으로 다림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답변의 내용은 아마 위에 내용과 같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기승전결이 없다. 사실 멜로 영화라 하면 기뻐하고 슬퍼하는 장면들이 나와줘야 하는데, 그런 부분은 다 없고 장면 장면만 있는 느낌이다. 정원이 죽을 때의 슬픔도 그저 영정사진 하나로 대체하고, 다림의 분노도 유리창에 돌 던지는 것으로 대체한다. 이러한 요소들이 전반적인 영화의 잔잔함을 이야기해 준다. 사실 예전에 군산에 놀러 갔을 때, 초원사진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왜 여기 사람이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는데, 이 영화를 본 후로 다시 군산에 가고 싶어졌다. 그 초원 사진관 주위에서 평화로운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다.

8월의 크리스마스가 참 아이러니하다. 한 여름에 어떻게 크리스마스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처럼 영화 내에서 죽음과 사랑의 공존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8월의 크리스마스만큼이나 힘들 줄만 알았던 그 둘이 함께 있었기에 영화가 더 아름다웠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