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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펄프 픽션 리뷰] 의인, 악인, 약자에 대한 정의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으며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을 세계적으로 알린 영화, 펄프 픽션이다. 내가 생각하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을 한 줄로 표현하자면, '오마주와 B급 영화를 가장 완성도 있게 만드는 감독' 이다. 주위 많은 사람들이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을 좋아하기에, 필자 역시 이 감독의 영화를 보기로 결심했고, 그 시작은 바로 1994년에 제작된 펄프 픽션이었다. 예전에 '바스터즈:거친 녀석들'에서 타란티노 감독을 처음 접했을 때 들었던 생각은 배우들의 대화만으로 긴장감을 고조시킬 수 있는 아주 대단한 능력을 가진 감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능력은 펄프 픽션에서 더욱 절실히 나타났다. 영화 초반에도 나오지만 펄프 픽션은 짧은 단편 모음으로 짜여진 싸구려 소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영화의 제목 답게, 짧은 장면들이 시간 순서에 관계 없이 무자비하게 나온다. 영화 중후반쯤 가면 도대체 '이 영화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지?'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데, 그 생각을 지니고 있다보면 영화가 끝난다.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이러한 허무함 속에서 다시 영화를 돌이켜보면 이런 싸구려 단편 장면들이 이어져서 하나의 긴 서사를 이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펄프 픽션

영화 초반에 나오는 사무엘 잭슨과 존 트라볼타. 시덥지 않은 빅 맥과 쿼터 파운드 치즈 이야기로 시작하여 그들의 보스 마르셀러스 웰러스의 부인에게 발마사지를 해준 남자가 보복을 당한 것이 정당한가 안한가에 대하여 토론을 한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하면서 피식 거리면서도 오로지 두 사람의 표정과 카메라 앵글 만으로 단숨에 영화에 빠져들게 되었다. 생전 처음보는 젊은 시절 사무엘 잭슨의 꼽슬머리 모습과 존 트라볼타의 포스 넘치는 모습만으로 영화가 흥미진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대화 장면에서 쥴스는 발 마사지를 한 게 큰 잘못이 아니고 보스가 과민반응 한 것이라고 하지만, 빈센트는 발 마사지는 중요한 이슈라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두 사람은 처음부터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뭔가 이 쌍이 영화 내내 중요한 역할을 할 것만 같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무엘 잭슨은 앞으로 2시간 가량 출연하지 않는다.

출처: 펄프 픽션

 

보스가 빈센트에게 자신의 아내를 하루 동안 챙겨달라고 부탁한다. 저녁을 먹는 두 사람의 대화는 너무나도 흥미롭다. 우선 5달러 쉐이크로도 저렇게 대화를 흥미진진하게 이어나가는데, 아까 장면에서 쥴스와 빅 맥 이야기도 생각해보면, 타란티노 감독은 음식을 영화소재로도 많이 사용하는 듯 하다. 여기서 핵심은 바로 미아 역의 우마 사먼이 이야기했던 '불편한 침묵'이다. '왜 편해지려면 쓸데없는 얘기를 지껄어야만 한다고 느낄까요? 입을 닥치고 편안한 침묵을 공유할 때 특별한 사람을 찾았다고 생각해요.' 보통 필자는 사람들을 만날 때 인원 수에 따라서 모습이 많이 바뀐다. 3명 이상이 모일 때는 청자와 중개자의 입장에서 대화에 참여하고, 거의 말을 많이 하지 않늗나. 하지만 2명에서 모일 때는 언제나 화자가 되어 대화의 주제를 이끈다. 별 이유가 없다. 불편한 침묵이 싫어서이다. 3명 이상일 때는 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나머지 사람들이 이야기하니까 괜찮지만, 2명에서 만날 때는 내가 이야기를 하지 않을 때, 동시에 상대도 이야기를 안한다면 침묵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그런 침묵이 싫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가려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지껄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어떻게 보면 침묵하는 게 그리 나쁜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말이 없을 때는 그냥 침묵하고 다른 생각을 하면 되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이야기를 꺼내면 되는 것이고. 쓸데 없는 이야기만 반복하는 것 보다는 그래도 의미있는 이야기 몇마디 하는 게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결국 실수를 하게 되고 가벼워보인다. 이제부터는 나름의 원칙을 바꿔서 조금 더 의미 있고 무게가 있는 말을 하고자 해야겠다.

많은 사람들이 펄프픽션의 명장면을 미아와 빈센트가 춤추는 장면이라고 한다. 빈센트는 앞선 쥴스와의 대화에서 미아에게 별 감정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지만, 대화가 고조되고 춤으로써 그 절정을 찍을 때 이 둘은 분명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이라 관객들은 확신한다. 하지만, 빈센트는 보스에 대한 충성심으로, 화장실에서 본인의 생각을 정리하며 자아를 되찾지만, 너무나도 쌩뚱맞게도 미아는 헤로인을 들이켜 죽을 위기에 처한다. 아무도 생각지 못한 전개로 영화가 흘러간다. 빈센트가 어찌어찌 미아를 살려 고비를 넘기고 이제 다시 무슨 일이 일어날까 고민하던 찰나 갑자기 복서 브루스 윌리스가 나타난다. 그리고 시계를 토대로 그의 이야기가 다시 새롭게 시작된다.

출처: 펄프 픽션

 

여자친구와 떠나려고 하는 찰나, 시계를 찾으러 다시 본인의 아파트를 찾아간 버치. 그곳에서는 보스의 부하 빈센트가 잠복하고 있었는데, 운이 없게도 화장실 간 사이에 버치가 찾아와 총을 발견하고 그를 단번에 죽인다. 영화의 반 정도 관객을 사로잡았던 존 트라볼타가 허무하게 죽는다. '역시 이게 바로 타란티노식의 영화지 하는 장면'이다. 맥거핀을 제대로 사용했다는 표현이 어울릴 듯하다. 영화에서 누구보다 중요한 것처럼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그런 극적 장치었다. 중간에 브루스 윌리스는 보스인 마르셀러스 웰리스를 만나고 우여곡절 많은 일을 겪지만 결국 여자친구에게 돌아간 후 오토바이를 타고 유유히 떠난다. 근데, 왜 아직 영화가 아직 많이 남은것인가?

출처: 펄프 픽션

 

우선, 지미 역할로 타란티노 감독이 나온다. 생각보다 연기를 너무 잘하신다. 감독들이 본인의 영화에 까메오로 많이들 출현하는데, 타란티노 감독은 그래도 생각보다 오랜시간 동안 영화에서 모습을 보여 존재감을 과시한다.

타란티노의 출현과 함께 영화는 쥴스와 빈센트의 이야기인 과거로 돌아온다. 사실 필자가 생각하기엔 여기부터가 정말 영화의 핵심 내용이 아닐까 싶다. 우선은, 누가봐도 죽어야만 하는 거리에서 적이 습격해서 쥴스와 빈센트에게 총을 쐈지만, 모두 빗나갔고 이 둘은 죽지 않았다. 여기서 쥴스는 이것이 바로 신의 은총이라며 회개한다. 그리고 보스 밑에서 일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한다. 당연히 빈센트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며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또 하나의 사건을 처리하고 그들은 레스토랑으로 향하는데 바로 영화 극초반에 나온 강도 부부가 있던 레스토랑이라는 것을 관객 누구나가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전혀 관련 없을 것만 같던 단편의 장면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영화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펄프 픽션이라는 제목과 너무나 딱 맞아 떨어진다. 쥴스는 강도들을 총 한자루와 대화만으로 압도하고, 그들을 용서하고, 그것을 넘어서 본인에 지갑에 있는 모든 돈을 그들에게 주고 유유히 퇴장한다. 여기서 쥴스가 가지고 있던 가방의 내용물도 사실은 별거 아니었다. 또 다른 맥거핀 효과.

출처: 펄프 픽션

 

개인적으로 쥴스와 강도 링고와의 대화가 최고의 명장면이라 생각한다. 쥴스는 누구를 죽이기 전에 항상 성경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그리고 영화에서 세번째로 읊는 이 구절은 이 장면에서야 비로소 그 의미가 살아난다.

에스겔서 25장 17절:

의인의 길은 사방에 탐욕스런자의 불길과 사악한 자의 횡포로 둘러싸여 있으니, 자비와 의로움으로 약자를 어둠의 골짜기에서 인도하는 자는 축복받으리라. 그야말로 진정한 형제의 책임자이자 잃어버린 아이를 찾는 자다. 그리고 내 형제를 음독하고 파괴하려는 자에게는 내가 거대한 복수와 엄청난 분노를 내릴 것이니, 내가 네게 벌을 내릴 때, 너는 내가 주임을 알게 되리라.

오늘 아침에 회개한 쥴스는 비로소 이 문장의 뜻을 헤아린다.

'넌 악인이고 난 의인이라고, 그리고 이 총은 목자야. 내 의로운 몸을 어둠의 골짜기에서 인도하는. 아니면 이런 뜻일지도 모르지. 자네가 의인이고 내가 목자야. 세상이 사악하고 탐욕스러운 거지. 그거 맘에 들어. 하지만 진실은 아니지. 진실은 넌 약자고 난 사악한 자의 횡포란 거다. 하지만 난 노력 중이야. 목자가 되려고.'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대화이다. 우선 의인이 되는 것은 너무나도 험난하고 힘든 일이며, 약자를 돌보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것이 바로 신이 원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이와 반대로 세상에 해가 되는 악인의 경우에는 의인이 나설 필요도 없이 신이 분노하여 벌을 내리게 된다. 의인과 약자와 악인. 이 구절은 본인이 해석하기에 따라 다른 듯하다. 아마 회개하기 전, 쥴스가 이해한 이 구절은 본인의 보스를 형제로 생각하여 보스를 음독하고 파괴하려는 자에게 총으로써 벌을 내리는 것이 바로 본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래서 본인은 의인이고 강도는 악인이라고 처음에 말했던 것이다. 아니면 강도가 의인이고 본인이 목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한다. 강도의 입장에서는 바꾸어 보면 그렇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은 강도가 약자고 쥴스가 사악한 자의 횡포라는 것이다.

백번 공감한다. 이 세상에 의인은 누구이고 약자는 누구이며 악인은 누구냐는 질문에 한가지는 확실히 이야기 할 수 있을 듯하다. 힘이 없는 자가 바로 약자이다. 우리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강한 자만이 약한 자를 밟고 올라선다. 그게 정의냐 할 수 있겠지만, 정의에 대한 정의는 누가 내리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이긴 자, 강한 자가 내린다고 대답할 수 있다. 그들이 곧 정의이고 패한 자, 약한 자는 정의가 아닌 것이다. 지금까지 역사는 승자에 의해서 기록되어 왔고,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의인과 악인은 어떻게 구별되는 것일까. 사실 이부분에 대해서는 필자도 정확한 답을 내릴 수는 없을 것 같다. 도덕이라는 것이 결국은 상대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본인이 생각하는 도덕성에 의해서 개개인마다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는 기준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쥴스는 본인이 악인에서 목자가 되려고 노력을 한다고 말하고 있다. 본인이 부도덕한 일을 행한다고 스스로 판단할 때, 그것이 본인의 기준 하에서 잘못된 것을 알고 바뀌려는 노력을 행한다면, 그것이 올바른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해석에는 나도 백번 공감일 간다. 하지만, 아직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복잡한 생각이 뒤섞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회개한 쥴스와 달리 예전과 똑같이 살아가다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빈센트의 모습을 보아 타란티노 감독은 마지막 쥴스의 말을 빌려 본인이 생각하는 의인, 악인, 약자에 대해서 스스로의 정의를 내려 관객들에게 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